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시라카와 덴노 (문단 편집) === [[남송]]과의 무역과 지샤(사찰과 신사) 세력에 대한 통제책 === 고시라카와인과 [[타이라노 키요모리]] 사이에는 정치노선 차이 같은 해소하기 어려운 대립이 존재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존의 관례나 편견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고시라카와인은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추진한 [[남송]]과의 무역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며, 귀족의 반대를 억누르고 확대를 도왔다. 일본은 헤이안 시대 초기에 견당사 파견이 중지되고, 200년 동안 중국과 일체의 교류를 가지지 않았다. 가오 2년(1170년) 9월 20일에 고시라카와인은 후쿠하라에 행차하여 남송 사람과 대면했다(《햐쿠렌쇼》, 《교쿠요》). 당시 일본에서 남송과의 무역은 민간 차원의 교역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하카타(博多)에 송나라 사람이 거주하는 마을이 있는가 하면, 에치젠 국(越前国)의 쓰루가(敦賀)까지 송나라 상선이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키나이(畿内, 기내)까지 송나라 사람이 들어오는 것은 이례적이었던 일로 우다 천황(宇多天皇)이 >"외국인과 접견하지 말라" 는 유계를 남긴 이래로 천황이 외국인과 접견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었기에, 쿠조 가네자네는 >"우리 조정에서는 엔기(延喜) 이래로 이런 일이 없었는데, 천마(天魔)의 수작일런가?" 라며 한탄했다. 대대로 하카타와 오와다노토마리(大輪田泊)를 잇는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 항로의 정비와 장악에 힘을 쏟아왔던 헤이케였지만 [[타이라노 키요모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송나라 상선을 기나이까지 들어오게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고시라카와인의 조력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었다. 5월 25일에 북방 오슈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藤原秀衡)를 진수부장군(鎭守府將軍)에 임명한 것도 남송과의 무역에 자금으로서 필요한 황금을 얻기 위해서였다고 여겨진다.[* 고시라카와인에게 키요모리가 헌상한 동물들도 일본에서는 자생하지 않는 것으로 남송과의 무역을 통해 들여온 것이었다.] 쇼안 2년(1172년) 9월에 이르러 남송에서 고시라카와인과 키요모리에게 보내는 물품이 도착했다. 물품과 함께 부쳐온 글에는 >"일본 국왕(고시라카와인)에게 하사하는 물색(物色), 태정대신(키요모리)에게 보내는 물색" 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교토의 귀족들은 중국의 중화사상이 드러난 '일본 국왕에게 하사한다'는 문장의 표현과, 물품을 보내온 것이 당시 남송의 황제인 [[효종(송)|효종]](孝宗)이 아니라 명주자사(明州刺史)라는 점을 문제로 들어, '서로 차별함이 없는 외교'에 반하는 것으로 보고 이 물품을 받지 말고 반첩도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발했다(《교쿠요》 9월 17일, 22일조). 그러나 이듬해 3월 3일에 좌대신(左大臣) 오이노미카도 쓰네무네의 조처로 반첩(返牒)이 나오게 되었고, 답하는 물품도 보내지게 되었다. 후지와라노 나가노리(藤原永範)가 초안을 작성하고 후지와라노 노리나가(藤原教長)가 정서한 반첩의 내용은 선물의 미려하고 진귀함을 칭찬한 것이었고, 고시라카와인은 금칠한 그림이 있는 궤짝에 색을 입힌 가죽 30매와 사금 100냥, 키요모리는 검 한 자루와 갑옷을 보냈다(《햐쿠렌쇼》 3월 3일조, 《교쿠요》 3월 13일조). 이후 일본과 남송 사이의 무역은 공적인 성격을 띠며 본격화되어 갔고, 수입품인 송전(宋錢)은 일본에 대량으로 유입되어 중요한 교환 수단이 되었다. [[남송]]과의 무역과 함께 고시라카와인이 적극적으로 임한 것은 지샤(사찰과 신사)의 통제였다. 이 시기 장원 영주로서 발전한 유력한 지샤들이 각지에서 지방관들과 분쟁을 일으키는 가운데 특히 강대했던 '''난토호쿠레이'''(南都北嶺, 남도북령) 즉 나라의 고후쿠지와 히에이 산의 엔랴쿠지는, [[나카토미노 카마타리|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천태종에 속하던 다무봉(多武峯)의 귀속 문제를 놓고 날카로운 대립 관계에 있었고, 쇼안 3년(1173년) 6월에 이 항쟁은 격화되었다. 고시라카와인은 분쟁의 조정에 나서서 양 사찰에 대중의 봉기 정지를 엄명했지만 6월 25일에 고후쿠지가 다무봉을 습격해 가마타리의 미카게당까지 전소시켰고, 주동자 색출 및 승강의 소환 명령에 대해서도 >"3,000 중도가 모두 장본인"(《교쿠요》 7월 21일조) 이라며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시라카와인은 홋쇼지에서 열리는 팔강법회에 고후쿠지 승려가 참가하지 못하게 금지시켜 버리고 고후쿠지의 벳토(별당)였던 심범 등을 해임했다(《햐쿠렌쇼》 6월 26일조, 29일조). 그 뒤 고후쿠지에서 처분의 철회를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10월 29일에 장본인이었던 가쿠교(覚興)가 유배되자 11월 3일에 강소와 엔랴쿠지 공격의 방침을 굳힌 고후쿠지는 우지(宇治)로 향했고 그곳에서 천태좌주(天台座主) 즉 엔랴쿠지 주지승의 유배와 각흥의 소환, 시치다이지(七大寺) 소유의 영지를 탈취하려는 엔랴쿠지 중들을 하옥시킬 것을 요구했다. 고시라카와인은 관병(官兵)을 동원해 고후쿠지 승병들의 교토 입경을 막는 한편으로 사자를 보내 설득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 일로 7일에 예정되어 있었던 가스가노마쓰리(春日祭, 춘일제)가 지연되었고, 11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구마노 참배도 시행이 불투명해지는 등 사태는 수렁에 빠져들었다. 고시라카와인은 마침내 선지를 내려 도다이지 ・ 고후쿠지 이하 난토(南都, 남도)의 15개 다이지(大寺, 대사) 및 여러 쿠니에 소재한 이들 사찰의 말사(末寺)가 소유한 장원의 몰수라는 전에 없었던 무거운 처분을 내리기에 이르렀다(《햐쿠렌쇼》, 《교쿠요》). 2개월 뒤에 15개 다이지 소유의 영지는 반환되었지만, 고시라카와인의 강경한 자세는 지샤 세력에 충격을 주었고, 야마토 국(大和国)의 국검(国検)이나 모리코에 대한 셋칸케 소유 영지의 상속 등의 일로 고후쿠지와 대립관계에 놓여있었던 헤이케는 이때 적극적으로 고시라카와인을 도와 신속한 행동에 나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